*- 나의 삶 나의 문학 -*

제 6회 샘터문학상 특별기획 - 인생특강 - 나의 삶 나의 문학 – 소설가 이광복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김성기 기자 | 기사입력 2019/10/15 [06:24]

*- 나의 삶 나의 문학 -*

제 6회 샘터문학상 특별기획 - 인생특강 - 나의 삶 나의 문학 – 소설가 이광복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김성기 기자 | 입력 : 2019/10/15 [06:24]

 

 

▲     © 김성기


 

《SAMTEO NEWS》

 

 

제 6회 샘터문학상 특별기획

  나의 삶 나의 문학

 

      – 소설가 이광복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날품팔이의 넋두리


  중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에서는 이른바 특수반을 운영했다.

석차 1등에서 60등까지를 선발하여 특수반으로 편성했다.

그러니까 이 특수반에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모여 있었다.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던 나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줄곧 특수반에 몸담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되자

고등학교 입시에 대비한 보충수업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학사일정과는 별개로 일종의 비공식 과외인 셈이었다.

나는 보충수업을 받지 못했다.

보충수업에 따른 별도의 수업료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집안은 가난하고, 부모님 연세는 많으시고…….

그 당시 우리 집은 근동에서 가장 가난했다. 극빈 중의 극빈이었다.

요즘 말로 말하자면 기초생활 보호대상인 셈이었다.

어쩌다 면사무소에서 무상으로 찌질 찌질 ‘구호양곡’이 나왔지만,

그것만으로는 허기를 달랠 수가 없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구호양곡을 통상 ‘배급’이라 불렀다.

배급 받으러 오라는 통지가 나오면, 어머니가 부대자루를 챙겨들고는

산 넘고 들 건너 휘적휘적 면사무소를 찾았다.

면사무소에서는 납작보리[壓麥], 밀가루, 강냉이가루 같은 양곡을 주었다.

어머니는 마치 동냥자루나 바랑 망태기 같은 짐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살아가는 살림이었으니 오죽했으랴.

더군다나 나는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 원증산마을

우리 집에서 논산읍 부창동에 있던 논산대건중학교까지

장장 10킬로미터를 도보로 통학하고 있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면 논산읍에서 하숙을 하거나,

버스 또는 자전거로 통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배부른 사람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머나먼 길을 걸었다.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허둥지둥 그 길을 걸어갔다.

점심은 빳빳이 굶어야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동료 학우들이 도시락 뚜껑을 열 때에는

반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꼬르륵꼬르륵 뱃속에서 피라미 여울 넘는 소리가 나면

운동장 가장자리로 나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는 벌컥벌컥 수돗물을 들이켰다.
그런 형편에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보충수업이라니……?

고등학교는 무슨 얼어 죽을 고등학교?

그건 호사 중에도 호사, 사치 중에도 사치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로서는 보충 수업료를 낼 수가 없었으므로

진학이고 나발이고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제외한 특수반 학우들은 전원 보충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동료 학우들이 보충수업을 받는 동안 등교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 부잣집으로 품 팔러 다녔다.

논도 매고, 콩밭도 매고…….

하루 노동을 마치고 나면 맞돈으로 따박따박 품삯을 주었다.

어른들보다는 적은 품삯이었지만,

품을 팔아 부모님 살림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하게 느껴졌다.
자본주의는 정말 가혹했다.

개뿔이나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뱅이는

학업의 기회에서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내 앞길을 걱정하며 억장 무너지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까지 그렇게 날품팔이를 하였고,

내친 김에 아예 학교를 작파할 결심까지 굳혔다.
에라, 좋다. 차제에 학교를 때려치우자.

그 대신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자.

문학을 하는 데 무슨 졸업장이 필요한가. 젠장,

문학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막노동으로 먹고살면 되지.

나는 그런 어설픈 생각을 하며

문학이야말로 내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필 문학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그럴 만한 내력이 있었다.

아직은 어쭙잖은 발상일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얘기책’을 많이 읽어 그런 선택을 했던 것 같다.

  본래 우리 집은 마실꾼들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수령(樹齡)을 헤아릴 수 없는 아름드리 감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밤마다 마실꾼들이 그 노거수(老巨樹) 밑으로 모여들었다.

모깃불 피워 놓고 밀대방석에 앉아 한바탕 이야기꽃에 빠져드는 동안

감나무에서는 툭탁툭탁 땡감이 떨어지곤 하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 집은 다른 집과 달리 식구가 단출했다.

따라서 겨울에도 거의 예외 없이 우리 집으로 마실꾼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예닐곱 살 때부터 마실꾼들, 즉 동네 아저씨들에게

『춘향전(春香傳)』『심청전(沈淸傳)』『흥부전(興夫傳)』

『유충열전(劉忠烈傳)』『장국진전(張國振傳)』『홍길동전(洪吉童傳)』

『삼국지(三國志)』『옥루몽(玉樓夢)』『홍루몽(紅樓夢)』 같은

얘기책을 읽어 드리곤 했다.
가물거리는 등잔불 아래 얘기책을 읽다 보면

어른들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어떤 대목에서는 “저런! 저런!” 하며 탄복을 자아내기도 했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아이고, 큰일 났네!” 하면서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절정에 이르러 상황이 느닷없이 반전되면

일제히 박수를 치면서 “와, 와” 환호성을 올렸다.

나 역시 어른들의 그런 추임새에 빨려 들어가 얘기책의 서사구조에 몰입하곤 했다.
어떤 얘기책이든 그 줄거리는 엎어지고 잦혀지고

곤두박질을 치면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다.

밤이 깊어지면 마실꾼들은 “자, 그럼 오늘은 거기까지만 읽고

내일 또 계속할까.” 하면서 자리를 파하곤 했다.

그분들은 그 이튿날 어김없이 모여들어 계속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얘기책 속의 그 서사구조가 바로 소설이요

문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감동으로 다가오는

재미있는 얘기에 심취해 있었다.

그렇지. 나 혼자서 그렇게 가슴 뭉클한 얘기를 쓰면 되잖아.

학교 공부를 작파하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마실꾼들의 발걸음이 부쩍 줄어

얘기책 읽어드릴 기회도 사실상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나는 벌써부터 미래의 이야기꾼을 꿈꾸고 있었으며,

3학년 여름방학의 보충수업에서 밀려난 이후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할 무시무시한 ‘문학 병’에 빠져 들었다.

그때쯤 해서는 학교 규정상 박박 밀어야 했던 까까머리 두발까지

더부룩하게 자라 꺼치렁 밤송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중요한 전갈이 왔다.

자전거로 통학하던 학우를 통해 날아든 선생님의 말씀인즉

거두절미하고 학교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갔다.

이발도 하지 않은 꺼벙머리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연민의 눈길을 보내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부잣집에 일하러 다녔습니다.”
“그랬구나. 보충수업은 빠졌다 해도 2학기 개학하면 학교에 나와.”
“네? 저는 아예 학교를 자퇴하려고 합니다.”
“뭐야?”
“선생님께서도 제 형편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부모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노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부모님을 봉양해야 합니다.

저 자신 매일 먼 길을 걸어서 통학하기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겠습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공부는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야.

네가 지금 학교를 그만두면 다시는 중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어.

긴 말 하지 말고 무조건 학교에 나와. 이발부터 하고 말이야.”
“저는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마련해 주면 되잖아. 그건 걱정 말고 학교에 꼭 나와.”

  선생님께서는 엄명을 내리셨고,

나는 그만 위압에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2학기 개학 때 쭈뼛쭈뼛 학교에 나갔다.

하지만 한 번 흥미를 잃어버린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지못해 나간 것이었다.
그 날, 선생님께서는 줄판과 철필과 사자표 원지 한 통을 주시면서

연습문제지 필경을 하명했다.

나는 일찍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원지를 긁은 적이 있었으므로 필경에는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원지를 필경하려면

늘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몸이 파김치처럼 늘어졌지만,

선생님께서 시키신 일을 중도에서 어영부영 그만둘 수는 없었다.

설사 쓰러질 때는 쓰러지더라도 끝까지 책임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석유등잔에서는 까만 그을음이 치솟았다.

나는 밀려오는 졸음을 하품으로 몰아내며 열심히 원지의 촛농을 긁어냈다.

살그랑 살그랑…….

줄판에 철필 긁히는 경쾌한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원지 필경을 마치고 나서 숙제까지 하려면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되어

지서(支署)로부터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곤 하였다.
살짝 눈을 붙이고 나면 이번에는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렸고,

닭 우는 소리와 함께 건넛마을 예배당에서 종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눈 비비고 일어나 서둘러 세수한 뒤

밥인지 죽인지 허둥지둥 조반을 해결한 다음

책가방을 싸들고는 사타구니에서 요령 소리가 날 만큼

빠른 걸음으로 등굣길을 재촉했다.
원지 한 장을 필경하면 선생님께서는

그에 따른 수고비랄까 필경료로 20원을 주셨다.

중학교 1학년 때 1분기 수업료는 9백 원이었고,

그때쯤 해서는 1분기(3개월) 수업료가 1천 5백 원 가량 하던 시절이었다.

인문지리를 가르쳤던 담임선생님뿐만 아니라,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연습문제지 필경 일감을 주셨다.

나는 필경사 고학생이 되어 근근이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년 개근에 이어 중학교도 3년 개근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이제는 모든 것을 접고 내 길을 갈 때가 되었다.

하지만 중3 때의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거의 ‘강제로’ 논산대건고등학교에 밀어 넣었다.

이는 우리 학교가 중·고등학교 병설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결국 내 의지와는 별 관계없이 엉겁결에 고등학생이 되었다.

선생님들께서는 나를 가엾고 기특하게 여기셨던지

이번에는 협동조합 구매부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이로써 나는 명실상부한 근로 장학생이 되었고,

수업료를 전액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선생님들께서는 중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수시로 연습문제지 필경을 맡겨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수업료를 면제받는 데다 별도의 필경료까지 받아

돈을 벌면서 학교에 다니는 독특한 학생이 되었다.

알리살리 필경료를 모아 학용품을 사 쓰는 것은 물론

참고서와 문학서적까지 사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공부하랴, 협동조합 일 보랴, 필경하랴,

1인2역 또는 1인3역을 감당하다 보니 항상 바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나에게는 다른 학우들과 달리 한 가지 공부가 더 있었다.

문학 공부였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학교 수업보다도 문학 공부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집안 여건상 어차피 대학에 들어갈 형편도 못 되었고,

문학에의 뜻을 굳힌 이상 집중적으로 한 우물을 파고들었다.

시간만 났다 하면 세계명작 등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특히 필경이 없는 날이나 공휴일에는 문학서적에 풍덩 빠져

꼬박 밤을 지새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서라벌예술대학 주최

전국 고등학생 문예콩클에 단막희곡 한 편을 응모해

당선작 없는 가작 1석으로 입상했다.

그해 가을, 성북구 돈암동 서라벌예대 시상식장에서

저 유명한 안수길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 뒤, 구체적으로 말해

1970년 1월 논산대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3년 과정도 개근했다.

그러니까 나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연속 12년 개근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세운 기록은 영원히 깨질 수 없는 불멸의 기록이다.

그렇게 모범적으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도

고향에서는 제대로 밥벌이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
나는 냇가에 나가 삽으로 모래를 긁어모았다.

블록 공장의 일용직 잡일이었다.

그러다 그 해 6월 5일 비장한 각오를 안고 상경했다.

하지만 서울은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사돈의 팔촌도 살지 않는,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도시에 발을 붙이기란 맨땅에 박치기하기나 다름없었다.
특히 내 나이는 호적상 두 살이 줄어 있었으므로

아직 18세 미만의 미성년에 지나지 않았다.

주민등록증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공무원 시험 응시 자격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어디 이력서조차 낼 수가 없었다.

구로동을 거점으로 영등포 일대를 헤매면서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과연 얼마던가.
그랬다. 나는 결코 일류 노동자가 아니었다.

차라리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노동판에서 잔뼈가 굵었더라면

노련한 노동자가 되어 있었을 텐데,

나야말로 냇가에서 모래 긁어모으는 잡일 이외에는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반쭉정이 노동자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꿈을 이루기 전까지는 죽어도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니, 고향에 돌아간다 한들 내가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고향을 떠나면서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넌 이상 밑바닥을 박박 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뭐 뚜렷한 앞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신동이니 수재니 천재니 별 칭송을 다 들으며

통산 12년을 개근할 만큼 성실하게 살아왔건만,

막상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을 때에는 온갖 눈꼴사나운 장벽뿐이었다.

별것도 아닌 저질 졸부들이 돈 좀 있네 뻐기고,

함량미달의 돌대가리들이 학벌 자랑하며 목에 힘을 줄 때에는

아니꼽고 티꺼워서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나는 그 살벌한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발버둥 쳤다.

그 과정에서 뼈마디가 물러나는 중노동과

유혈 낭자한 자존심의 상처를 감내하기란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악으로, 깡으로…….

때로는 목숨 건 일전을 불사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 나는

어느 사이엔가 맹수 같은 ‘독종’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렇듯 현실과 부딪치는 동안 실의와 좌절이 꼬리를 물고 줄기차게 따라왔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가슴에는 쓰라린 한이 응어리로 맺혔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었다.

문학에의 길. 청계천 헌책방을 누비며 보고 싶었던 책을 손에 넣었을 때에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꼭 읽고 싶었던 작품을 구하면

서울에 오기를 참 잘했다고 자위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상경 이후 약 이태 동안 가위 살인적인 고생을 하고 나서

호적상 나이 만 18세에 이르렀을 때 가까스로 어느 잡지사에 취직했다.

이를 계기로 내 생업은 종래의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의지가지없는 외톨이 촌놈이

이 도시에서 스스로 설 자리를 찾기란 요원하기만 했다.

아, 어느 세월에 먹고 자고 누울 자리를 마련할 것인가.
한편,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부터 매년 일간지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역량이 모자라 번번이 최종심에서 낙방했다.

그러다가 1973년 문화공보부 (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장막희곡을 응모,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상했다.

기뻤다. 그 이듬해인 1974년에는

『신동아(新東亞)』 논픽션 현상모집에 우수작으로 당선했다.
그동안 외곬으로 신춘문예만을 고집했던 나는,

1976년 여름 대작가 안수길 선생님께 단편소설 한 편을 보여 드렸다.

안 선생님께서는 선뜻 그 단편소설 「불길」을

『현대문학(現代文學)』 9월호에 추천해 주셨다.

초회추천(初回推薦)이었다.

이 소설이 발표되자마자

일본의 『친화(親和)』에서 「炎」이란 제목으로 번역하여 전재(轉載)하였다.

나는 다시금 부랴부랴 단편소설을 써서 역시 안 선생님께 보여 드렸고,

안 선생님께서는 그 단편소설 「향연(香煙)」을

『현대문학』 1월호에 추천해 주셨다. 완료추천(完了推薦)이었다.
이로써 나는 문단에 발을 들여 놓았고,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소설가라고 불러주었다.

『현대문학』 추천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

나는 안 선생님의 각별한 배려로

초회 추천을 받은 지 불과 4개월 만에 완료 추천을 받았다.

그 이후 여기저기에서 원고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고려원 등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전작 장편소설 계약을 제의해 왔다.
그 해 마음씨 착한 한 여성을 만나 결혼도 했고,

1978년 고려원에서 전작 장편소설 『풍랑의 도시』를 간행했다.

문단의 반응이 그런 대로 괜찮았다.

그 이듬해인 1979년에는 『월간독서(月刊讀書)』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목신(牧神)의 마을』로 당선했다.

이 작품은 KBS가 라디오 연속극으로 제작하여 방송하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나는 그 여세를 몰아 1980년에 들어서면서

첫 창작집 『화려한 밀실』 등 한 해에 책을 네 권이나 간행했다.

  그 후 소설, 동화, 영화대본, 교양물 등 물불 가리지 않고 여러 장르의 글을 썼다.

간행된 책만 해도 소설집, 장편소설 등 수십 권을 헤아린다.

여기에 사사(社史) 편찬, 남의 자서전 대필 등

무기명 또는 타인 명의로 나간 글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까.

이처럼 찬 밥 더운 밥 가리지 않고 죽을 동 살 동

거의 초인적으로 글을 쓰는데도 무슨 업보인지 고단한 생활고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방에 콱 들어박혀 작품다운 작품만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쌀값, 연탄 값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학비 문제가 두 어깨를 짓눌렀다.

내 생활은 언제나 살얼음판 위를 걷듯,

아니면 작두날 위를 걷듯 아슬아슬하였다.

그럴 때마다 잡지사나 출판사에 잠깐잠깐 취직해 들락날락하며 위기를 넘기곤 했다.
자본주의는 문학의 세계라고 해서 예외일 수가 없었다.

장편소설을 쓰려면 최소한 그 작품을 쓰는 동안의 생활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자본이 없었다.

말하자면 항상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형국인지라 언제나 헐떡헐떡 숨이 가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난 세월 직장에서의 안주보다는

진정한 ‘전업작가’가 되기를 희구했다.

그러나 무늬만 전업작가일 뿐

나는 아직까지 참다운 전업작가가 되지 못했다.

모름지기 전업작가라고 하면 글을 써서 그 수입으로 먹고살 수 있어야 할 텐데

지금까지의 내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그 대신, 저 모진 시련을 헤쳐 나오는 동안 훌륭한 상을 꽤 받았다.

1987년 대통령표창, 1990년 제7회 동포(東圃)문학상,

1992년 제2회 시(詩)와시론(詩論) 문학상,

1994년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

1995년 제 14회 조연현문학상·대통령표창,

2005년 제1회 문학저널창작문학상·

제19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 공로상(문인부문),

2007년 노동부장관 표창, 2012년 제28회 PEN문학상,

2014년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문화예술부문)·

제14회 들소리문학대상,

2016년 제30회 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문인부문)·

제3회 익재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번듯한 직장 없이 날품팔이 자유인으로 살다보니

꽤 오랜 동안 문학단체의 부름을 받아 직원 또는 임원으로 몸담았다.

그동안 한국소설가협회 사무차장·사무국장·감사·이사·부이사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이사의 일원으로 법인 운영에 동참하고 있다.

국제PEN클럽한국본부에서는

1995년 제28대 집행부 시절부터 수차 이사직을 연임하고 있으며,

2001년에는 사무처장에다 문화정책위원장까지 겸임한 적도 있었다.
한국문인협회와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월간문학(月刊文學)』

기자를 시작으로, 1992년 제19대 집행부 출범과 동시에

줄곧 이사직을 연임해 오는 동안

2005년 1월부터 2007년 1월까지 사무처장 대우 편집국장,

2007년 1월부터 제24대 소설분과회장을 역임했고,

2011년 1월 제25대 임원 선거에서 부이사장에 당선돼 상임이사를 겸임했다.
어디 그뿐인가.

2015년 1월 제26대 임원 선거에서

또 다시 부이사장에 당선돼 영광의 재선을 기록했고,

제25대 집행부에 이어 제26대 집행부에서도 상임이사를 겸임했다.

2019년에는 이사장에 출마,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지난 2월 13일 마침내 제27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많은 문인들의 따뜻한 배려와 과분한 사랑이 여러 가지로

부족한 나에게 이런 직임(職任)을 마련해 주었다.

실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보면, 문단에 첫 발을 들여놓은 이래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혈기 왕성했던 나는 어느덧 이순(耳順)을 훌쩍 넘어

고희(古稀)를 바라보게 되었다.

평생토록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했던 부모님께서 돌아가셨고,

나를 추천해 주신 안수길 선생님을 위시하여

가까이에서 모셨던 문단의 여러 어른들 또한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동안 내 신변에도 숱한 우여곡절들이 있었다.

우선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 성장했다.

3남매 중 두 녀석은 벌써 가정을 이루었고,

늦둥이 한 녀석은 아직 학업 중에 있다.

가족들과 더불어 굶어 죽지 않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기적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특히 아이들이 큰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자라 준 것은 가위 천운이라 하겠다.
그 사이 문단에는 새별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1970년대 한국문인협회 회원은 1천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1만 2천여 명을 훌쩍 넘어섰다.

한국소설가협회의 경우 창립 당시에는 회원수가 2백 명 안팎이었으나

이제는 무려 1천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자못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변화의 현장에서 나는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에게

얘기책을 읽어 드리던 열정으로 선후배 동료 문인들을 한없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모두가 권력과 돈에 눈 먼 이런 혼탁한 시대일수록

문학의 가치는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나는 내 신분이 문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아무리 어려운 궁지에 몰리더라도 가당찮은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괜히 구질구질한 궁상을 떨지도 않았다.

모름지기 문인이라면 그 정신이 추상같이 형형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적으로 곤궁해지거나 정신력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진다 싶으면

가차 없이 긴장의 고삐를 잡아챘다.

수업료가 없어 보충수업을 받지 못했던 고향에서의 지긋지긋한 가난과

영등포에서의 피눈물 나는 밑바닥 중노동.

그 지옥 같은 고통을 회상할라치면 저절로 정신이 번쩍 들면서

불퇴전의 용기가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한편, 나는 지금까지 여러 문학단체에 관여해 오면서

어떻게 하면 문학의 사회적 위상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을 거듭해 왔다.

이 고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어쨌든 내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앞으로 반드시 작품다운 작품을 써내야 할 것은 물론,

여러 은인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문단의 미래를 위해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야 할 현실적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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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광복

충남 부여 출생
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창작 현상모집 장막희곡 입선
1974년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 당선
1976년 『현대문학』 소설 초회 추천
1977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완료
1979년 『월간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
[주요경력]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 기자, 편집국장, 소설분과회장(제24대) 역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제25대~제26대, 상임이사 겸임) 역임.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교수 역임.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처장, 문화정책위원장, 이사(제28대~제34대)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 역임.

한국문학진흥 및 국립한국문학관건립공동준비위원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제27대). 『월간문학』『한국문학인』 발행인 겸 편집인.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정책위원회 위원.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 위원.
대한민국 명예해군

 


[주요작품]


ㆍ소설집 󰡔화려한 밀실󰡕 󰡔사육제󰡕 󰡔겨울여행󰡕

            󰡔먼 길󰡕『동행󰡕『만물박사(전3권)󰡕


ㆍ장편소설 󰡔풍랑의 도시󰡕 󰡔목신의 마을󰡕 󰡔폭설󰡕

               󰡔열망󰡕 󰡔술래잡기󰡕 󰡔겨울무지개󰡕 󰡔바람잡기󰡕

               󰡔송주임󰡕 󰡔이혼시대(전3권)󰡕『삼국지(전8권)󰡕

               󰡔한 권으로 읽는 삼국지󰡕 󰡔사랑과 운명󰡕

               󰡔불멸의 혼-계백󰡕 󰡔구름잡기󰡕 󰡔안개의 계절󰡕

               󰡔황금의 후예󰡕


ㆍ콩트집 󰡔풍선 속의 여자󰡕 󰡔슈퍼맨󰡕


ㆍ전래동화 󰡔에밀레종󰡕


ㆍ교양서적 󰡔태평양을 마당처럼󰡕
               󰡔세계는 없다󰡕 󰡔끝나지 않은 항일투쟁󰡕

               󰡔금강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천수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문학과 행복󰡕


--시나리오 󰡔시련과 영광󰡕 󰡔아, 대한민국󰡕 외 다수

 


[수상]


대통령표창(1987). 제7회 동포문학상.

제2회 시와시론문학상.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

제14회 조연현문학상. 대통령표창(1995).

제1회 문학저널창작문학상.

제19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 공로상(문인부문).

노동부장관 표창. 제28회 PEN문학상.

제14회 들소리문학상 대상.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문화예술부문).

제30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대상.

제3회 익재문학상. 제9회 정과정문학상.

제3회 한국지역방송연합(KBNS)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SAMTEO NEWS》

 

발행인 이 정 록 회장
취재 본부장 오연복 기자
보도 본부장 김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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